순천향 역사관

설립자의 생애와 순천향의 역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설립자의 삶

  •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고) 시절의 서석조 박사 대구고보 시절 동무들과 함께한 서석조 박사(오른쪽에서 첫번째) 일본 교토부립의과대학 재학시절 축구부원으로 활약한 서석조 박사(첫줄 왼쪽에서 세번째)
  • 될성부른 나무 의사를 꿈꾸다

    서석조 박사는 1921년 4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화전리 도리원에서 부친 서경선 어른과 모친 박래선 어른의 일곱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사는 셋째아들이었지만 일찍이 세상을 뜬 백형과 중형을 대신해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집안의 기둥역할을 해왔다.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학창시절 문학과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고,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박사의 누이는 “동생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총명했으며 노래를 잘 불러 또래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얌전한 성격이라 친구들과도 다투는 일도 없었고, 손재주가 뛰어나 장난감도 잘 만들곤 했다. 언제나 말썽이 없는 착한아이로 아버지가 늘 칭찬하셨다.”고 회고했다.
    서경선 어른은 일제치하에서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장로로서 교회 4곳을 설립하기도 했다. 신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고, 시대의 흐름을 일찍이 깨달아 자식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는 등 ‘기러기 아빠’를 자청했다.
    손위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꿈꿨던 박사는 대구 경북중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교토 부립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 맨주먹 유학생 신분으로 이룬 최고의 의술

    유학 도중 일본이 패망 기운이 짙어지면서 가족들은 귀국했고,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입지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도 박사는 홀로 남아 끝까지 학업을 마쳤다. 학비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고, 고학생으로서 어려운 유학생활이었음에도 박사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잘 마무리 해냈다.
    해방 이듬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내과 조교로 근무했던 박사는, 이번에는 최신 실증의학인 미국의학에 대한 갈망을 삭힐 수 없었다. 박사는 결국 평탄한 삶 대신 유학을 선택하고, 또 다시 맨주먹으로 미국 길에 오른다.
    미국 유학역시 고학생 신분이었지만 성실한 자세로 수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백인 우월주의가 만연했던 1950년대 동양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의과대학 교단에 서는 이례적인 족적을 남겼다. 얼마나 지독한 노력으로 능력을 평가받았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9년 여름, 뉴저지 세인트발나바스 병원에서의 인턴생활을 시작으로, 뉴욕 록포트 나이아가라 사나토리움 병원의 흉부내과, 뉴저지시티 메디컬센터의 내과, 뉴욕 벨뷰병원(코넬대) 신경내과 등 당대 유명병원들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다. 수련기간 내내 박사는 항상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제시하는 등 촉망받는 의사로 명성을 날렸다.
    고군분투하며 수련을 쌓아가던 중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박사는 수련을 그만두고 귀국을 준비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와 같이 피폐해진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선진 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의사의 존재일 것이라는 믿음 아래 다시 짐을 풀었다.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더욱 수련에 최선을 다한 박사는 결국 실력을 인정받아 1954년 7월 미국 동부지역 명문인 코넬대학교 의과대학 신경내과 강사로 임명되기에 이른다.
    가슴을 짓누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을 참아내며 묵묵히 의학자의 길을 걸어온 서 박사의 선견지명과 남다른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의학계는 큰 손실을 입을 뻔 했다. 특히 신경과학의 발전은 한참이나 뒤쳐졌을 것이다.

  • 뉴욕 시립 벨뷰병원 신경내과에서의 유학시절 뉴욕 코넬의대 강사재직 당시 신경내과 교실원들과 기념촬영
  • 세브란스병원 재직당시. 서 박사는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 “향설의 앞선 진료는 본보기요, 촉진제였다”

    7년여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게 피폐해져 있었다. 사회기반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어 기본적인 위생관리조차 어려워 국민 건강관리가 매우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전쟁 통 파병 미국 군의관들을 통해 선진의학을 접한 젊은 의학도들의 유학 붐이 일던 때라 의료기관들은 인력수급이 무척 어려웠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조차 교원이 부족한 처지였다. 서석조 박사의 존재는 더없이 빛났다. 내과 조교수로 파격 초빙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연세대 의대 김명선 학장은 박사를 스카우트한 후, 너무도 경이롭고 신비에 가까운 진료에 경탄했다고 한다. 부임한지 불과 3개월이 지났을까, 박사는 주임교수 및 세브란스병원의 내과과장으로 전례 없는 승진을 했는데, 그의 나이 만 34세였다.
    동료의사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신경내과 의사’라는 찬사가 이어졌고, 선진의학을 이용한 그의 진료는 모든 동료 및 선․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요, 더 나은 진료 성과를 낳는 촉진제였다. 더욱이 신경과학이 제대로 정립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신경학에 통달했던 그의 존재는 빛을 더욱 발했다. 늘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후학들에게 일인자로 추앙받고 있다.

  • “오감五感이 기억하는 전설적인 강의”

    전설적인 스승으로 남아있는 서 박사는 살아있는 노트였다. 당시 대부분의 교수들은 강의 노트를 가지고 들어와 칠판에 판서를 하면 학생들은 그것들을 베껴 적기에 바빴다. 그러나 박사는 노트 하나 없이 강의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이론과 더불어 임상실습의 실례를 직접 적용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강의를 이해하고 기억하기에 수월했다. 일례로 신경 반사작용을 강의할 때는 학생을 앞으로 불러 신경테스트를 직접 시연해보였고 학생들끼리 직접해보는 등 오감을 이용해 기억에 남도록 했다.
    특이한 교수법 외에도 박사는 그림 실력도 뛰어나 잊고 있다가도 그림만 보면 금방 생각나는 훌륭한 강의를 진행했다며 제자들은 입을 모았다. 강의 중 분필을 양 손에 쥐고 단숨에 인체해부 단면도를 그려냈다고 한다. 뇌와 척추, 그리고 신경의 단면도까지 도해해서 신경기능과 해부학적 구조를 연결해 설명했다. 미국 유학시절, 시체를 앞에 두고 수없는 밤을 새며 해부도를 그리고, 뇌 모형 만들기를 반복한 결과였다.
    원서로 된 의학서적 한권 사기가 매우 어렵던 시절, 신간 의학서적을 프린트해 학생들에게 일일이 나눠줬고, 본인의 머리와 가슴에 있는 모든 경험을 공유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본인의 꿈과 이상향에 대한 열정에 배어 있었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크나큰 애정을 쏟는 스승을 두고 반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을까.

  • 연세대의대생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던 서 박사의 강의 모습들 연세대의대생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던 서 박사의 강의 모습들
  • 서 박사의 연세의대 강의 모습. 학생들은 타대학으로 떠나는 스승을 수업을 보이콧하면서까지 붙잡을 정도였다.
  • 시위를 벌여서라도 잡고 싶은 큰 스승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서 박사도 넘지 못하는 장애물이 있었다. 한국사회의 아주 못된 고질병인 파벌이다. 유학 붐이 일던 시절, 공부를 하고 돌아온 의사들은 출신교끼리 파벌을 형성하고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서석조 박사는 파벌을 강하게 질타하며, 자신의 앞길을 좀 더 발전적으로 닦기 위해 가톨릭의대 초빙에 응했는데, 이때 연세대 의대생들이 강의를 보이콧하고 시위를 하는 등 한바탕 큰 소동이 일었다. 훌륭한 스승을 붙잡고 싶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 신경과의 태두, 확고한 위업 세워

    박사는 도전정신도 선견지명도 대단했다. 미국 유학에서 불모지였던 신경과학을 택했던 것은 향후 신경과 의사가 크게 필요할 것이고, 무엇보다 조국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분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유학 후엔 누구나 인정하는 신경과학의 일인자였다. 첨단 의료기기도 진단해내지 못하는 질환을 정확하게 진단해낼 정도였고, 약물처방의 달인이었으며, 신경과의 태두로서 여러 확고한 업적들을 세웠다.
    1961년 발표한 논문「뇌졸중 환자 100례에 대한 임상적 관찰」은 뇌졸중 진단과 치료의 전기가 되었고, 이듬해 대한의사협회가 선정한 ‘숙제보고’를 통해서도 뇌졸중에 관한 중요 연구결과를 발표해 또 한번 큰 발전을 이룬다. ‘숙제보고’는 1년에 한 사람만 선정되던 것으로, ‘한국 의학계의 노벨상’으로 평가될 정도로 권위를 가졌었다. 이때 뇌졸중腦卒中이라는 용어는 박사가 처음 만들어 사용했으며, 병명에 대한 정확한 용어정리와 함께 뇌질환의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박사는 의식불명의 상태로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수면제를 적절하게 이용해 마비 상태를 풀어주는 치료법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치료법은 후에 ‘Barbiturate Coma Therapy'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공인 혼수요법으로 자리 잡았다. 서 박사는 늘 신선하고 획기적인 발상으로 동료의사들에게 발전동기를 부여했고, 의학발전을 크게 이끌었다.
    당시 내과에 포함돼있던 신경과의 분과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고, 신경과학회의 당위성과 발전가능성에 대해 확신하며 학회를 창설할 것도 누누이 주장했다. 결국 박사의 활약으로 신경과학은 독립의 길을 걷게 됐다.
    박사는 1971년 2월 25일 대한신경과학회의 전신인 대한신경내과학회를 창설했고 초대회장으로 취임했다. 늘 신경과학회의 독립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 불철주야 애써온 산물이었다. 이처럼 박사는 눈앞의 이익을 좇기 보다는 먼 미래를 바라봤다.

  • 성모병원 시절, 야유회에서 동료들에 둘러싸인 서 박사. 최고의 의술과 고매한 인격으로 모두에게 추앙받던 그는 거대한 업적과 함께 신경과학의 터전을 다졌다.
  • 명사들이 앞다퉈 찾았던 명의 서 박사는 자신의 의술로 일본을 설득해 영친왕이 고국의 땅을 밟게 했다. 당시 신문들의 영친왕의 귀국 보도 모습
  • 명사들이 앞 다퉈 찾은 당대 최고 명의

    진료, 연구, 교육.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업적을 세움에 따라 박사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서, 부통령, 영부인, 국무총리 등 저명인사들은 앞 다퉈 주치의로 모셨다. 특히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는 매우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성모병원 재직 시엔 비운의 대한제국 마지막 왕, 영친왕을 한국으로 모셔와 치료했다. 일본에서도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영친왕은 당시 뇌 혈전증으로 신체 대부분이 마비상태였고, 실어증까지 더해진 상태. 뇌혈관 전문 의료진의 부재를 이유로 일본에서도 만류하는 것을 서 박사는 본인의 실력을 입증해 영친왕을 귀국시켰고, 실어증의 영친왕과 표정으로 대화하고 6년 간 밤낮으로 정성을 쏟았고, 마지막까지 병상을 지켰다. 당시 수련의에 의하면 박사는 때때로 어두운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고 한다. 냉철한 판단으로 진료를 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환자의 슬픔을 공유하던 인간미 넘치는 박사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허례허식 배척하고 환자진료에만 집중

    힘들게 배워온 선진 의학지식은 물론 선진 의료문화의 장점도 적극적으로 접목하고 나섰다. 미국식 수련의 교육과 교실 내 학술활동 문화도 도입해 활성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사선과와 임상병리과와의 합동 학술회의를 진행하는 등 다학제간 교류도 시작하는 등 지금은 일반화된 선진 의료문화를 현장에 도입해 발전을 도모했다. 선구자의 모습으로 일관했던 서 박사는 늘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늘 환자중심적인 사고로 임했다.
    성공을 위해서는 의례 특정 학교 간판과 학위 등을 내세워야만 했던 풍토였음에도 전문의 자격이나 박사학위와 같은 요식과 명분에는 일절 구애받지 않았다. 학생을 지도하는 데, 환자를 진료하는데 요식과 명분은 허례허식일 뿐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학 중에도 전문의,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만 수료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늘 보여주기 식의 겉치레 보다는 알맹이를 중요시했고, 제자 교육은 물론, 병원 경영, 직원을 뽑을 때도 그러한 신념을 고수했다.

  • 박사의 가운과 청진기 서 박사의 왕진가방
  • 서 박사가 작성한 진료기록지와 그가 집필한 논문들 평소 박사가 지녔던 소지품들
  • 환자진료에는 대충이 없던 완벽주의자

    환자진료에 있어서는 언제나 철저한 자세를 갖출 것을 강조했다. 회진 때면 주치의들에게 환자의 기본정보나 검사결과 수치에 대해 물어보곤 했는데,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차트를 살펴보면 대답을 듣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적어도 자기가 진료하는 환자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박사에게서 수련을 받은 의사들은 지금도 환자들의 검사 수치까지 외우고 있다.
    휴일에도 거르지 않고 병실 회진을 하는 등 박사는 환자에 대한 강한 책임감으로 진료에 임했다. 어느 날 패혈증이 의심되는 불명열 환자가 응급실로 들어와 검사를 시행한 적이 있는데, 외부회의가 있었음에도 원내 연구실에서 끝까지 결과를 기다렸다가 직접 지시사항을 짚어줬다. 대부분 보직이 높은 의사들이 검사지시 후 전화로 결과통보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진료는 신뢰감으로부터 시작된다며, 환자의 얘기를 충분히 청취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더불어 진찰은 시진視診 촉진觸診, 타진打診이 원칙이라며 어느 하나도 대충 넘어가지 말라고 강조 했으며, 배움이 길고 의학지식이 많다고 환자 앞에서 자만하지 말고 환자로부터 인정받고 존경을 받을 때 참다운 권위가 생기는 것이라고 교육했다.

  • 환자를 몰고 다니는 의사

    박사가 가는 곳마다 환자가 몰렸다. 환자들이 박사를 따라 다녔다고 해도 맞을 정도였다. 세브란스병원, 가톨릭의대 성모병원, 박사가 잠시 개원했던 동은의원과 삼성의 고려병원, 그리고 백병원까지 수많은 환자들이 박사를 따라갔다. 박사가 옮기자마자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보통 2~3개월을 기다려 진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환자들이 이렇듯 박사를 찾고 의지했던 이유는 의술만 뛰어나서가 아니다. 늘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어루만져주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박사는 언제나 환자가 하는 이야기라면 그 무엇도 허투루 듣지 않았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환자는 박사의 앞에서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마음이 편해졌고, 치료효과도 배가 되었다. 서석조 박사라면 믿을 수 있다는 소문이 먼 지역까지 파다했다.
    대학의 학장과 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수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박사는 1990년까지 40년 동안 환자진료를 쉰 적이 없다. 외래 및 입원환자 진료는 물론, 왕진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항상 환자들과 함께 했다. 이는 환자가 보내주는 신뢰에 대한 보답이었으며, 환자를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박사에게 1순위는 언제나 환자였다.

  • 환자의 마음의 상처까지 어루만져 구름환자를 몰고 다닌 서석조 박사

순천향의 기원

  • 동은의원 개설로 ‘참 의료인’ 실천 구체화

    오랜 시간 유학을 통해 서구인들의 탈권위적이고 환자중심적인 모습을 지켜봐왔던 박사는 그러한 사고를 지닌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마음껏 의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했다. 1964년 11월 유학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하나의 소망을 실현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서울시 중구 저동에 동은의원을 개설한 것이다. 중부경찰서 맞은편 2층 건물에 둥지를 튼 동은의원은 10병상 안팎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병원이었다. ‘참 의료인’으로 존경받던 박사의 개업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렇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진료로 세브란스병원 재직 때부터 당뇨로 고생하던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고, 이것이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으로 옮기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968년 11월 번창일로에 있던 동은의원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새로 설립되는 고려병원 부원장으로 취임한 데에는 의학 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박사의 욕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고려병원은 삼성그룹이 설립한 병원으로, 1967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조운해 원장을 통해 박사의 영입을 타진한 것이다.
    당시 박사는 고려병원 개원과 함께 의과대학도 설립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후학 양성과 고려병원을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을 만들기 위해 개인의 명예와 보수를 버린 대신 의료계 발전과 참된 의료인 양성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박사의 꿈은 오래되지 않아 요원해졌다. 당시 의료인만이 병원을 개설할 수 있도록 의료법이 개정된 뒤였기 때문에 삼성은 의과대학을 부정적으로 판단했고 결국 의대 설립은 무산되었다. 고려병원의 의대 설립이 무산되자 박사는 1972년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한 백병원의 내과부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박사는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의사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학생교육과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과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게 되었다. 고려병원에서의 실망스런 경험은 오히려 올바른 경영철학과 교육철학을 세우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 서울 순천향병원 개원기념 단체사진 서울병원 개원식 후 주요 보직자들과 함께한 서 박사
  • 어려울 때마다 빛났던 향설의 인맥

    1972년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된 백병원 내과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 박사의 꿈은 한참 뒤로 밀려나는 듯 보였지만, 곧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의료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지금껏 인연을 맺었던 각 부류의 동료들을 모아 준비를 시작했는데, 모두들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준비에 집중했는지 모른다.
    박사는 사람을 귀히 여겼다. 한번 맺은 인연은 허투루 대하지 않고 귀히 여겼는데, 그래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훌륭한 제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고, 간호사, 행정직 직원들까지도 끊이지 않는 교분을 유지했다. 박사의 넓고 깊은 인맥은 순천향병원과 순천향대학교를 설립할 때 모두 큰 힘이 돼주었다.
    총무처로부터 불하받은 병원부지인 한남동 땅은 여름이면 홍수로 물이 차던 황무지였다. 1972년 드디어 첫 삽을 뜨고, 건물을 막 올리는 중에 공교롭게도 시멘트 파동이 일어났다. 공사가 중단될 위기라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평소 박사와 친분이 있던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이 충분한 양의 시멘트를 공급해준 덕에 큰 혼란 없이 병원을 지을 수 있었다. 이렇듯 중요한 순간마다 박사의 인맥은 큰 힘을 발휘했다. 이후로도 많은 난관이 이어졌지만 박사는 그 만의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모두 극복해내고 병원 건립을 완성해낸다.

  • “한국의 메이오 클리닉을 짓겠다”

    박사는 유학시절부터 가장 이상적인 병원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을 롤 모델로 삼고 평소 미국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을 닮은 병원을 짓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메이오 클리닉은 미국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세계적인 병원이다. 수술 여부를 결정할 때에도 여러 과의 협진과 토론, 그리고 투표로 결정을 내리는 등 탈권위적인, 환자중심의 진료를 시행한다.
    박사는 1972년 12월 서울 한남동 657번지 일대 1,004평을 매입해 이듬해 4월 3일 착공식을 갖고 25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의 꿈은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으로서 연구기능을 강화하고, 의대 설립을 통해 대학과 병원을 한데 묶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구상은 새로운 병원운영 시스템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국 의료계의 시대적 소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병원 신축공사가 한창이던 1973년 8월 5일 박사를 비롯한 13명의 관계자가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의료법인 순천향병원 설립총회를 갖고 의료법인 순천향의료재단을 발족시켰다. 이때 이사장인 그가 거의 모든 재산을 신설 의료법인에 출연할 정도로 순천향병원은 그의 삶 전부였다. ‘순천향’이라는 이름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주치의를 지냈던 박사와의 인연으로 지은 것으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박사는 1973년 11월 보건사회부에 의료법인 순천향병원 설립허가를 신청, 12월 27일 의료법인의 설립허가를 받아 이듬해 1월 20일 초대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의료법인 순천향의료재단은 단순한 의료법인 설립을 넘어 대한민국 ‘최초의’ 의료법인체라는 상징성과 함께 역사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 향설 서석조 박사
  • 국내 최초 의료법인 순천향병원 개원

    1974년 의료법인 순천향의료재단이 설립되고, 같은 해 5월 마침내 순천향병원도 개원했다. 250병상 규모(지하 2층, 지상 8층, 옥탑 2층의 연건평 3,300평)로 당시에는 큰 규모였으며, 장비 및 시설도 최첨단이었다. 의료진 역시 서석조 박사를 위시해 당대 최고 실력의 의사들이 총집합해 있어서 의료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KBS뉴스에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거대한 건물의 간판에 걸린 순천향병원.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순리’라는, 그리고 ‘질병은 하늘이 고치고 의사는 그 과정을 도울 뿐’이라는 박사의 철학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박사가 그토록 소망했던 ‘메이오 클리닉’을 닮은 병원이 이상에서 세상으로 나와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개원 후 박사는 오랫동안 안타깝게 생각해왔던 모자보건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센터 건립에 대한 필요성을 안팎으로 피력해 우리나라 첫 모자보건센터도 이뤄냄으로써 국가 모자보건사업의 방향과 모델을 제시하는 큰 업적을 세웠다. 센터 개설 후엔 인맥을 활용해 일본의 게이오 대학과의 교류를 이어줘 센터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순천향병원에 큰 규모로 들어선 센터는 비슷한 시기에 구미와 천안병원에도 들어섰고, 우리나라 소아과와 산부인과 분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병원 설립 취지서에 잘 드러나 있듯, 순천향병원 개원이 갖는 의의는 결코 새로운 종합병원의 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순천향병원은 우리나라 의료계 전체의 발전과 관련되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탄생했으며, 실제 개원 이후부터 질과 양에서 우리나라의 종합병원들의 많은 발전을 선도해왔다.

문명은 현대인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는 반면 정신적 및 육체적인 피로와 긴장으로 인한 인간개체에 대한 질병의 침식도 점차 다양화되고 심화하는 경향에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음.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기타공업의 발전과정과 병행하여 도시와 농촌지대를 막론하여 야기되고 있는 공중위생의 제반 문제점에 대하여는 중요한 당면과제로서 연구대상이 되어야할 것임.
본 법인은 이러한 기초의학분야 외 임상의학 및 공중위생학 등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의 일익을 분담하고자 종합병원 순천향병원을 설립하는 바이며, 이 병원에 병설될 농촌의학, 풍토병, 공해, 건강관리, 임상의학 등의 각 연구 기관과 의료인의 양성은 이러한 목적달성에 한층 더 효율적인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국민건강관리에 공헌하는 바가 클 것을 확신하고 이 법인을 설립하는 바임. <순천향병원 설립 취지서>

  • 아산 신창벌에 펼쳐진 교육자 향설의 꿈

    서 박사의 꿈의 종착역은 병원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훌륭한 의료 인재를 양성하는 의과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순천향병원이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였음에도 박사는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원내분위기를 안타까워했으며, 특히 교수급 동료의사들이 공허해 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상아탑 건설에 속도를 낸다.

  • 서울 순천향병원 개원초기의 행정부서장들 서울 순천향병원의 위용 서울 순천향병원의 초기 모습

의사로서 종합병원 한쯤은 해봐야겠다 싶어 시작하였더니 진료에 시달리기만 했지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더군요. 의과학이라는 것이 쉬지 않고 공부해야 되는 것인데 병원만 가지고는 학문하는 풍토를 만들 수 없어요. <의학신보 1978년 3월 9일자>

1974년 7월 8일 학교법인 동은학원 설립을 위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으며, 마침내 1978년 1월 14일, 설립인가를 받아 충남 아산군 신창면 읍내리에 순천향의과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왜 하필이면 좋은 곳 다 두고 시골일까?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째서 의과대학을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충남 아산군 신창면 읍내리에 세웠느냐는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본인의 순천향의대 설립 취지가 되겠기에 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료혜택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매우 부족한 형편에 있습니다. 더욱이 의사의 도시 집중 현상으로 인해서 농촌의 의료혜택은 아주 보잘것없는 형편이어서 아직도 무의촌 현상이 해소되지 않은 실정에 있습니다. -중략-
본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의 설립은 본인이 평소에 품고 있던 우수한 의학도의 배출 및 농촌 의료 문제 해소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뜻의 구현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본 의과대학을 통해 훌륭한 의술을 연마한 많은 의학도가 배출되어서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치료함은 물론 새로운 의학연구의 산실로서 명실 공히 국가, 사회에 봉사하는바 크리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향록학보 1978 9월 30일 창간호>

  • 처음부터 수도권에 대학을 세우려는 꿈도 꾸지 않았다. 박사는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지역간 불균형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하고, 그래서 지방에 의과대학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의과대학 교수가 최초로 설립한 의과대학, 순천향의과대학은 그렇게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하는 박사의 신념에 의해 탄생됐다.
    1977년 9월 드디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갔고, 엄동설한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다소 어려움이 있어 개강 예정일을 2주 넘긴 3월 15일에야 비로소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최종목표는 의료인뿐 아니라 장차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헌신할 인재들 더 많이 키우고 배출해내는 것이었다.
    1978년 ‘순천향의과대학’이라는 교명으로 돛을 올릴 때만 해도 외형 및 인적 구성은 소규모였다. 당시 의과대학 직원은 교수 6명에 과장급 직원 1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 또한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남학생 80명이 고작이었으며, 이들은 충남 아산군(현 아산시) 신창면 한 귀퉁이 야산 기슭의 아담한 2층짜리 양옥 한 채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비록 학교 규모나 인원은 단출했지만 국내 최고의 명의들로 구성된 교수진은 일류 의과대학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이때 박사는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향후에는 메머드급 종합대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캠퍼스도 맹산(孟山)을 넘어 창암리 구릉까지 확대할 구상을 했는데, 1978년 4월 5일 식목일에 전교생과 함께 장차 캠퍼스로 편입될 창암리 구릉에 나무를 심은 것도 이와 같은 포석 때문이었다.
    향후 순천향의대는 1980년 순천향대학으로 교명을 바꿨으며, 1990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2000년대 중반부터 지방 명문사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박사가 꿈꿨던 이상향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 순천향인들도 벌써 약 6만여 명이 배출되어 수많은 분야에서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향설의 마음을 쏙 빼닮은 순천향병원

    의료법인 순천향의료재단은 향후 병원과 대학의 긴밀한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1978년 1월 의료법인 순천향의료재단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2월 순천향중앙의료원을 출범시키면서 1979년 5월에 의료법인 동은의료재단으로 다시 태어났다. 또한, 의과대학을 설립하면서 한남동에 위치한 서울 순천향병원을 대학의 부속병원으로 변경했고, 순천향병원 개원 이후 1977년 서산 보건의료사업소, 1979년 구미, 1982년 천안, 1984년 음성(1995년 매각)에 이어 2001년에는 부천에도 연이어 병원을 열어 전국적인 의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구미와 천안병원은 의료법인(동은의료재단) 소속으로, 서울과 부천병원은 대학과 함께 학교법인(동은학원) 소속으로 각각 운영되다가 2008년 10월 모두 동은학원 소속으로 통합되었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병원들을 세운 것 역시, 대학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는 의료사각지대 구석구석까지 인술의 손길을 뻗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말까지도 우리나라 의사의 전국 분포 상황은 서울과 부산에 전체의 60% 이상이 집중되어 있어 중소도시 및 지방은 심각한 의료 취약지역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 개교 당시 본관과 실습관 모습 대학 인근 저수지에서 열린 첫 신입생 환영회 신입생 환영회 도중 저수지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박사의 뒷모습 의과대학 첫 입학식

의료취약지역 해소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순천향병원들의 개원시기와 개원 당시 병상수 및 초대 병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74년 5월 6일 의료법인 순천향병원 개원(250병상)
초대원장 김학현 박사, 부원장 유훈 박사
1977년 5월 1일 충남 서산 보건의료사업소(삼화의원)개원 (15병상)
초대원장 김현광 선생
1979년 9월 10일 순천향 구미병원 개원(250병상)
초대원장 김정완 박사
1982년 7월 7일 순천향 천안병원 개원(200병상)
초대원장 김학현 박사, 부원장 김영석 박사
1984년 4월 2일 순천향 음성병원 개원(80병상)
초대원장 박희주 박사
2001년 2월 1일 학교법인 순천향대학교 부속 부천병원 개원(621병상)
초대원장 김부성 박사, 부원장 신원한 박사
서울병원 역시 당시 서울에서 가장 의료 취약지역 중의 하나인 한남동 일대에 세워진 대도시형 종합병원이었으며, 그 이후에 개원된 충남 서산 보건의료사업소는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농어민을 위한 농촌형 병원, 구미병원은 경북 굴지의 공업단지인 구미에 산업재해 병원이 전무한 점을 고려해 세워진 공단형 병원, 천안병원은 종합병원이 전혀 없는 전국 유일지역 충남 지역에 세워진 도시형 병원, 음성병원은 의료 최대 취약지구인 중부 내륙지방에 세운 소도시형 병원, 그리고 부천병원은 급격히 조성된 대규모신흥주거지역에 세워진 유일 대학병원으로 모든 순천향병원들은 당시 각 지역의 부족했던 의료서비스를 획기적으로 충족시켰다.

  • 서울병원 부천병원 천안병원 구미병원
  • 본래 박사가 이상으로 삼은 것이 미국 ‘메이오 클리닉’. 그 병원이 지역에 뿌리 내리며, 세계적인 병원으로 성장했듯이 모든 순천향병원들이 한국의 ‘메이오 클리닉’으로서 각자 터 잡은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병원, 대학, 지역이 동반 발전하는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또한 탈권위적이고 환자중심적인 모습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박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순천향인들의 노력이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30년을 넘게 이어졌다. 그동안 향설의 마음을 쏙 빼닮은 순천향병원들은 수익보다 환자를 우선시하는 인술의 공동체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으며, 지역의 중추병원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잡아 나갔다.

  • 한국의학과 교육발전 선도한 위대한 별

    서석조 박사는 1990년 3월 30일 40여 년간 이어온 박시인술博施仁術의 행보를 끝낸다. 대학과 병원이 크게 성장해나감에 따라 증대된 대학 및 병원 경영을 충실히 돌보기 위해 부득이 환자진료를 접은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박사는 약 5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진료 후엔 마지막 환자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이후 박사는 종합대학과 지역의 중추병원으로 성장한, 대학과 4개 병원의 안정적인 자리매김과 재도약의 발판을 탄탄하게 다지게 된다.
    저 높은 곳에서도 박사의 힘이 필요했던 것일까? 향설 서석조 박사는 1999년 향년 79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의료계와 교육계의 커다란 별이 된 것이다. 그의 영결식이 거행되던 1999년 12월 23일, 하늘에서 마치 ‘향설鄕雪’의 부재를 위로라도 하듯 흰 눈이 펄펄 내렸다.
    온 몸을 바쳐 의료계와 교육계의 발전을 이끌어 온 박사는 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국민훈장 동백장」이란 대한민국의 주요 분야에서 큰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했을 때 국가가 내리는 상이다. 1951년에 신설되었으며, 현재는 문화훈장국민장에 해당된다. 또 중앙교육심의회 위원, 사학분과위원장, 한국대학법인협의회 이사 등으로 활동한 박사는 의학교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도 여러 상을 받았다.

  •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환자와 기념촬영한 서 박사 향설 서석조 박사의 영결식

순천향정신 ‘인간사랑’

  • 향설의 이상과 사랑을 품은 순천향

    순할순順, 하늘천天, 고향향鄕. 왠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지는 세 글자만 봐도 순천향대학교와 부속병원의 설립정신과 교육철학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병원을 세우면서 이름을 고민할 때, 평소 서석조 박사를 잘 알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그의 좌우명과 의학철학을 담아 지었다고 하며, 박사는 순천향順天鄕을 본인의 아호인 향설鄕雪보다도 더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박사는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순리’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질병은 하늘이 고치고 의사는 그 과정을 도울 뿐’이라는 말을 의학철학으로 삼고 평생 가슴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런 자세로 평생을 임했기에 박사는 말 그대로의 인술仁術을 펼칠 수 있었고, 환자들도 그의 정성과 노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환자들이 그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의사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구보다 겸손하고 자신들을 사랑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박사의 사랑과 이상을 오롯이 품은 순천향은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막강한 규모의 네트워크를 자랑하며, 현재 국가 교육의 산실이자, 병원그룹으로 성장해 있다.

  • 향설의 ‘인간사랑’, 순천향 정신이 되다.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선친을 보고 자란 박사는 선친으로부터 넓고 뜨거운 가슴을 물려받았다. 의사가 되고 나서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생활이 어려운 이웃을 늘 사랑으로 감싸고 도왔다. 환자가 치료비와 보살필 가족이 없어 입원을 못할 때면 스스로 보증인을 자청했고, 진료 중 환자가 푸념을 늘어놓아도 이를 들어주는 것도 진료의 하나라며 구구절절한 내용을 듣고 기억할 정도로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정말 남달랐다.
    1989년부터 2년간 서울병원 신경과 레지던트로서 박사의 회진을 수행했던 박형국 교수(천안병원 신경과장)는 박사의 환자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남다르고 각별했는가를 증언한다.

  • 박사를 기억하는 모든 후배, 제자들은 그를 언제나 휴머니스트로 묘사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인간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권위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한국의 의료문화를 타파하고, 환자를 배려하는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했던. 박사는 진정한 한국 의학계의 선구자였으며,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실천한 참된 의사였다.
    박사는 순천향정신을 ‘인간사랑’으로, 교시校是는 ‘진리, 봉사, 실천’, 원훈院訓은 ‘성실, 봉사, 연구’로 정했다. 인술이든 교육이든 참된 인간사랑 정신이 필수적이라는 게 박사의 신념이었다. 이와 같은 박사의 유지를 계승, 발전 시켜서 우리 사회와 나라 발전에 끊임없이 공헌하는 것이 순천향인의 근본이다.

  • 위대한 힘 ‘인간사랑’ 순천향을 이끌다.

    남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 박사가 그 위대한 마음으로 품어 낳은 것이 바로 순천향이다. 큰 이상으로 순천향이라는 커다란 생태계를 만든 박사는 동료, 후배, 제자, 직원들에게 ‘인간을 사랑할 것’을 당부하며, 이를 순천향인의 정신으로 귀결시켰다.
    박사는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좋은 의료기기, 아무리 훌륭한 병원시설을 갖추었더라도 환자를 진심으로 돌보아주려는 의사의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 의료기기는 한낱 쓸모없는 기계에 불과하며, 환자를 정성으로 보살펴주려는 간호사의 봉사정신이 없다면 그 의료시설은 쓸데없는 공간만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더불어 박사는 자만하지 말 것과, 나보다 남을 위해 살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참 지성인, 참 의료인, 참다운 병원으로서 모범을 보이기를 바랐다.
    순천향정신인 ‘인간사랑’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모든 순천향인을 하나로 모으고 성장의 원동력으로서 끊임없이 작동해왔고, 또한 ‘나보다 남을 위하는’ 마음을 형성함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봉사를 실천하고, 인류애를 높이는 모습은 이제 순천향인의 표상으로 완전히 구축되었다.
    박사가 그리기 시작한 이상적인 순천향의 모습은 여전히 미완이지만, 박사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밑그림은 워낙 훌륭한 것이어서 조금만 수정과 덧칠을 거쳐도 순천향은 당당해지고, 빛이 난다. 그러나 지방의 명문사학으로 지역의 거점병원으로 오래도록 작동하고, 순천향의 이름이 더 큰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것은 영원히 우리 순천향인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참다운 의인이요, 위대한 스승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향설 서석조 박사의 발자취는 전국 곳곳에서 지금도 여전히 빛나며, 순천향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동은학원의 大통합

  • 뭉치면서 더 강해진 순천향. 통합으로 경쟁력 UP

    1978년 순천향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순천향은 학교법인(동은학원)과 의료법인(동은의료재단)으로 나뉘어졌다. 대학과 서울병원, 부천병원은 학교법인으로, 또 천안과 구미병원은 의료법인으로 소속을 달리하며 이원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다 보니 순천향의 각 기관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정체성마저 흐려지면서 순천향 전국 네트워크는 그 막강한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1997년 박사의 뒤를 이어 지속적으로 병원과 대학의 경영에 참여해오던 박사의 장남 서교일 총장(당시 이사장)은 그 문제점을 간파하고, 2008년 대단한 세기적인 용단을 내린다. 의료법인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학교법인 동은학원으로 무상 양도해 통합시킨 것이다. 수천억원대의 유․무형의 재산가치를 보유한 의료법인을 이렇듯 무상으로 학교법인에 양도한 사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사학계와 의료계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법인 통합은 양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천여 명의 의료법인 소속 직원들을 일시 퇴직시키고, 다시 학교법인 교직원으로 신분을 갈아 태우는 복잡한 고용승계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수백억원의 퇴직금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투명하고 탄탄한 경영으로 임해왔던 순천향이라고는 하지만, 현 열악한 의료제도 하에서 병원을 경영하면서 현금 수백억원을 일시에 정산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대단한 용단도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이렇게 간단치 않은 통합 후 일련의 부담스런 상황을 순천향은 모두 감내하고 일사천리로 명쾌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해서 순천향은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이게 되었고, 이후 순천향은 엄청난 전국 네트워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이용해 승승장구․일신우일신하며, 향설 서석조 박사의 이상과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
    학교법인 동은학원東隱學園의 ‘동은東隱’은 박사의 장인인 김두하(金斗河, 1894~1957) 선생의 아호雅號이다. 경북 포항 출신인 김두하 선생은 수산업 등 사업으로 크게 부를 일으켰으며, 고매한 인품과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 자세가 항상 다른 이의 표상이 되었고, 어려운 이웃을 위하는 일이나 지방의 교육시설을 세우는 일에는 많은 재물을 쾌척했다. 박사는 그런 빙부聘父를 평소 존경해 온 터였고, 그래서 한 때 서울 중구 저동에서 운영했던 병원 이름도 ‘동은의원(1964~1968)’으로, 순천향대학교를 설립하면서도 학교법인의 이름을 ‘동은학원’이라 지었던 것이다. 순천향대학과 순천향병원을 안아 성장시키고 있는 동은학원은 그렇게 빛나는 가치를 품고 성장해가는 곳이다. 순천향SCH Pride! 정말 순천향인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박사가 영면한지 십수년이 흐른 지금. 박사의 도전정신․인간사랑 정신으로 태어난 대학과 4개 부속병원은 학교법인 동은학원으로 합쳐지면서 더욱 질적, 양적 모든 면에서 엄청난 성장과 발전을 이루고 있다.
    1978년 78명의 학생이 고작이던 황량한 캠퍼스는 이제 2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으로 가득찼고, 순천향정신은 지역을 넘어 세계로 내달려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도 찾아와 순천향의 품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4년 250병상으로 시작된 순천향병원의 규모는 현재 3천병상의 규모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전체 교직원 수도 이제는 6천명을 넘는다.
    이렇게 세계인이 괄목상대하는 순천향의 위상과 힘은 학교법인 동은학원이라는 한 울타리 안으로 뭉쳐지면서 더욱 힘이 세졌기에 가능했다. 뭉치면 세진다는 말을 입증하듯, 순천향 전국 네트워크는 통합 후 경쟁력을 높이는 시너지 효과를 내며 재도약의 엄청난 엔진으로 작용하고 있다.

  • 2008년 12월 천안병원 법인전환 기념식에서 서교일 이사장이 인사말을 전하며 미소짓고 있다. 법인전환 기념식에서 김선주 당시 천안병원 병원장과 최미영 노조위원장, 그리고 박종석 교수협의회 의장이 서교일 이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캄보디아 승려를 진료하고 있는 서교일 이사장. 선친 서석조 박사를 키운 선진의학을 이제는 후진국 국민들에게 적극 베풀고 있다.